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리 모토나리 (문단 편집) == 생애 == 1497년, 아키의 호족인 모리 히로모토(毛利弘元)와 역시 아키의 호족으로 모리 가문의 방계 출신 후쿠바라(福原) 부인[* 후쿠바라 가가 모리 가에서 갈려나온 지가 상당히 오래되어서, 이 부부는 혈통으로도 9촌 숙질간이고 족보로는 무려 20촌 조손간인 그냥 남남이다.]의 2남으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에는 당대의 [[주고쿠]] 지방에서 전통의 [[오우치]] 가문과 함께 양대 세력으로 떠올랐던 신흥 강자 [[아마고 츠네히사]]의 밑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해 어머니는 5세 때 잃고, 아버지는 10세 때 잃고, 형은 19세에 잃었다. 다행히도 계모 스기노카타가 재혼도 하지 않고 모토나리의 양육에 전념해 친어머니의 부재를 메워주었고, 모토나리도 계모를 친모처럼 의지했다. 이것도 보통 고생이 아닌데, 그외 친척들도 도움을 안주었고 이후에 가문의 당주가 되었을 땐 이노우에 일족의 간섭을 받게 돼서 다시 한 번 고생의 세월을 보냈다. 오죽하면 모리 가문이 잘되라고 비는 사람은 이 나라에 없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17세 때는 명나라 사람들이 모리 가문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들 중 관상을 잘 보던 사람이 모토나리를 보고는 [[http://valhae.kr/301|한 고조, 당 태종의 풍모가 있다]]고 평한 적도 있다고 한다. 외교와 모략에 능통하여[* 희생을 최소화하며 최대의 효과를 얻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평생 동안 모략과 암살을 자주 행했다. 이츠쿠시마 전투만 해도 절대 열세였던 모토나리가 모략을 통해 전세 역전한 전투로 과거 자신과 함께 싸운 경험이 있는 명장 [[에라 후사히데]]가 회유되지 않자 내통 위장의 공작으로 그를 처리하고, 자신의 가신인 [[카츠라 모토즈미]]를 거짓 투항시켜 상대를 해로로 몰아넣었다.], 신흥 강자인 이즈모 아마고 가문과 전통의 명문인 스오우 오우치 가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가문을 보전했다. 모리 가문은 [[가마쿠라 막부]]의 중신인 오에노 히로모토(大江広元)에서부터 내려오는 명가이기는 했지만 아키의 일개 고쿠진(国人)에 불과했고 이즈음에는 가신들의 실권이 당주를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당장 가문의 총령인 아버지와 형이 급사했었고 형의 뒤를 이은 조카 고마쓰마루도 9세로 요절해 자신이 가독이 된 처지였다. 모토나리는 횡포를 부리는 가신 이노우에 모토카네(井上元兼)를 숙청하거나 반역을 일으킨 동생 아이오 모토츠나(相合元網) 및 그와 함께한 와타나베씨 일족 등을 물리치는 등 전형적인 센고쿠 다이묘답게 치열한 내부 분쟁을 통해 주가의 권력을 확고한 것으로 만들었다. 아마고 츠네히사가 아이오 모토츠나를 은밀히 후원했기 때문에 불만을 품었고, 아키의 친 아마고 세력인 아키 다케다 가문의 사토카나야마 성을 구원한 이후에도 아마고 가문의 포상이 적다고 불만을 품어 마침내 오우치 가문을 주가로 모시게 된다. 장자 [[모리 타카모토]]가 열다섯 살이 되자 오우치 가문에 인질로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무렵 아마고와 오우치 모두 각자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모리에 신경쓰지 않았고, 나중에 아키의 친 오우치 세력 히라가씨 내부의 분쟁으로 아마고 하루히사가 아키로 진군하는 것을 모리 모토나리가 막아서면서 둘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 요시다코리야마 전투에서 모리 모토나리가 열세에도 불구하고 선전했고, 적절한 때에 오우치 요시타카의 구원을 받아 아마고 군을 대파하면서 많은 아마고 측 성주들이 오우치 가에 붙었다. 그러나 얼마 뒤 오우치 가가 아마고를 공격했다가 아마고의 작전에 말려들고 아키의 호족 킷카와 오키츠네[* 모토나리의 아내 묘큐의 조카이다.]가 배반하여 역으로 오우치가 대패하며 다시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다([[1차 갓산토다 성 전투]]). 모토나리도 이 전투에서 부하의 희생으로 목숨을 겨우 건져 돌아갔다. 1546년 아내 묘큐와 의붓 어머니가 죽은 뒤 타카모토에게 가독을 넘겼다. 그러나 여전히 가문의 일에 관여하고 있었다. 킷카와 오키츠네가 그 전 아마고와의 전투에서 배반한 것 때문에 킷카와 가 내에서 지지를 잃고 결국 축출되자 모토나리는 둘째 아들 모토하루를 보내 당주로 세운다. 그 뒤 강한 수군을 보유한 아키 호족 누타 코바야카와 가에도 모략을 걸어 가문을 분열시키고 어렸던 당시 당주의 누나와 자신의 셋째 아들 타카카게를 결혼시키며 타카카게를 누타 코바야카와 가 당주로 세웠다.[* 그전에 코바야카와의 분가인 타케하라 코바야카와 가의 당주로 타카카게를 보냈다. 이 일로 코바야카와 가는 통합되었다.] 이로서 [[킷카와 모토하루]],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를 시작으로 모리 료센[* 양천 (両川), 모리 모토나리의 차남 킷카와 (吉川) 모토하루와 삼남 코바야카와 (小早川) 타카카게를 가리키는 말.] 체제가 이루어졌다. 한편 대패 이후 오우치 가는 당주인 [[오우치 요시타카]]가 문화 생활에 빠져 무신들을 천시했는데, 이에 점점 가문 내에서 고립되어가던 무신파의 [[스에 하루카타]]가 1551년 [[하극상|주군을 죽이고,]] 분고의 오토모 요시아키의 차남으로 오우치 가에 양자로 들어온 [[오우치 요시나가]]를 당주로 내세워 주가를 장악했다. 모토나리는 일단은 하루카타를 인정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척을 했다. 하루카타는 원래 모토나리와는 험악한 사이가 아니어서 모토나리가 전 당주 요시타카를 지지하던 호족들을 공략하는 것에 대해 도움을 주었고, 아예 모리가 아키와 빈고의 호족들을 지배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동맹까지 맺었다. 그러나 아마고 하루히사의 공격을 또다시 모토나리가 막아내며 모리 가문의 세력이 커지자 점차 경계하기 시작했다. 1554년에는 명목상의 상하 관계도 끊어진다. 모토나리도 스에 하루카타와의 결전을 생각했지만 병력에서 절대적인 열세였다. 하루카타는 명문가였던 [[오우치]]의 힘을 그대로 빼앗았기 때문에 3만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모토나리는 5천이 고작이었다. 거기다 영지를 늘려놓긴 했어도 주고쿠의 호족들이 언제 모리를 배반하고 하루카타 쪽으로 붙을지도 모를 일인 데다 아마고 가문이 배후를 공격해 올 수도 있었다. 모리 모토나리가 아마고 하루히사에게 거짓 편지를 보내 하루히사로 하여금 숙부 구니히사를 의심하여 죽이게 하고, 구니히사가 이끌던 아마고 가문의 정예 무사 집단인 '신궁당'을 제거했다고 알려졌었다. 그러나 하루히사가 원래 신궁당의 두목이자 숙부인 구니히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구니히사의 아들 사네히사의 횡포로 이미 신궁당은 아마고 가 내에서 지지를 많이 잃은 상태였다. 그래서 현대의 연구에서는 이 일이 모토나리의 모략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루히사가 직접 신궁당을 제거했다는 쪽으로 굳어졌다.[* 이 변화를 보여주는 게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의 묘사인데, [[노부나가의 야망 천상기]]에서는 모토나리의 책략으로 의심에 빠진 하루히사가 신궁당을 제거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에서는 신궁당 제거가 모토나리의 책략으로 인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 뿐 모토나리는 아들들에게 '제멋대로 갖다 붙이기는. 나는 아무 것도 안 했다'는 식으로 혀를 차면서 “우리 영내에 있던 아마고 가의 간첩들이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나야 모르지”라며 능청을 떤다. 직접 손을 썼다기보단 불씨를 던져놓은 것 정도로 묘사한 것.] 어쨌든 뒷조심을 없앤 모리 모토나리는 편지 한 장[* 이츠쿠시마가 요충지이며 빨리 점거해야 유리하다는 내용]이 스에 하루카타에게 입수되게 하여 하루카타를 이츠쿠시마로 꾀어낸다. 스에 하루카타는 2만 이상의 대군을 이끌고 이츠쿠시마로 왔지만 이츠쿠시마 자체가 대군이 움직이기에는 불리한 지형이었다. 악천후가 겹쳐 통제가 불능해진 하루카타의 대군은 모리 가문의 3천 군세에 각개격파로 대패했고 대기시켜놨던 군선들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인솔해온 무라카미 수군에 의해 전멸했다. 하루카타는 근처의 동굴로 피신했으나 곧 자신의 형세를 비관하여 자결했다. 이것이 [[일본 3대 기습]] 중 하나인 [[이츠쿠시마 전투]]이다. 이미 오우치 가문은 스에 하루카타가 쿠데타 이후 권력을 쥐고 있었는데 그런 하루카타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었으니 허울만 남았다. 곧이어 모토나리에게 공략당했고 당주 [[오우치 요시나가]]는 자결하여 수백년간 서국 최고 명문이던 스오우 오우치 가는 멸망한다. 이에 아마고 하루히사는 오우치의 영향력에 있던 [[이와미 은광]]을 공략한다. 모토나리는 반격했지만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얼마 뒤 하루히사가 급사하고 아들 요시히사가 뒤를 이으며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중재로 휴전을 맺는다. 이 휴전은 아마고 측에 불리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에 불만을 품은 이와미의 아마고 측 고쿠진들이 대거 모리 가로 돌아서면서 아마고 가는 붕괴되기 시작한다. 모토나리는 이 기회를 노려 이즈모 공략을 결심했고, 얼마 뒤 맹약을 깨고 다시 공격을 개시한다. 1년 넘는 농성전 동안 모리 타카모토가 급사했지만 아마고가의 거성인 이즈모 갓산도다 성을 함락시키고 사실상 아마고를 멸망시켰다([[2차 갓산토다 성 전투]]). 이로써 모리 모토나리는 평생의 숙적을 모두 처단하고 주고쿠의 패자가 되었다. 아마고 멸망 때 모토나리의 나이는 71세로, 인생오십년이라고 일컬어지던 그 시대 기준으로 고령에도 매우 정정했다. 이후에는 오우치 가문의 영토였던 북 [[규슈]]에 진출해 오래도록 오토모 가문과 분쟁을 벌였고, [[산인]] 지방에서 아마고의 잔당들을 일소하고 모리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려 노력했다. 모리 모토나리의 말년에 아마고 가문의 가신이었던 [[야마나카 시카노스케]]가 등장하여 잠시 난동을 부렸는데, 모리 모토나리 생전에는 결판이 나지 않았다. 장남인 [[모리 타카모토]]가 일찍 죽었으므로, 손자인 [[모리 데루모토]]를 후계자로 지명했는데 데루모토는 유약한 인물이라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모든 정무를 도맡아했다. 산하 세력들의 독립성을 어느 정도 인정한 사례에 대해서 모토나리가 보수성을 띠고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그가 독립성을 인정한 것은 권력이 약해서였지, 보수적이어서가 아니었다. 다시 말하지만 모리 가문은 일개 고쿠진일 뿐, 오우치, 야마나씨처럼 수백 년간 관서를 지배하며 쌓아 올린 권위가 없었고, 아마고씨처럼 명문가 출신의 슈고다이도 아니었다. 그래서 권위와 권력이 모두 부족했고 독립성이 강한 관서 고쿠진들과 [[잇키]]를 맺어 연맹의 대표로서 활동하면서 자기 권력을 점진적으로 강화해야 했다. 심지어 모토나리는 1 ~ 2개 국을 지배하는 대영주가 된 시점에서조차 분국법을 제정한다거나 다수의 고쿠진들에 대한 지배력을 극적으로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고쿠진들과 잇키를 맺어야 했다. 아키 모리씨와 산하 고쿠진들과의 관계는 오래도록 주종 관계와 계약 관계가 뒤섞인 상태였고, 아키 모리씨는 강력한 권위를 지닌 전국 다이묘로 군림하지 못하고 상당한 기간 동안 고쿠진 잇키의 수장으로 있어야 했던 것이다. '자신의 형과 아버지는 술을 많이 마셔서 단명했는데 자신은 술을 마시지 않아 이렇게 장수했으니 너희도 술을 마시지 말아라.'라는 논지의 말도 남겼다. 근데 한편으론 한 가신에게 "술은 마시면 기분 좋게 한다."라고 하고선 한편으론 "저런 걸 왜 마시는지 모르겠단 말이야."라고 말하기도. 아마 부하들 기분 풀어주려고 한건지도. 어쨌든 모토나리 본인은 평생 금주했고 그 때문인지 당시 인물로는 제법 장수한 편이다. 젊어서(10대 초반) 이츠쿠시마에 참배하러 갔을 때 부하에게 어떤 소원을 빌었냐고 묻자 부하는 "주군께 주고쿠를 달라"고 빌었다고 대답했다. 이를 들은 모토나리는 '''천하를 달라고 빌어도 주고쿠를 얻을까 말까 하거늘 소원을 비는데 고작 주고쿠를 달라고 했단 말이냐'''고 얘기했다고 한다. 젊어선 확실히 야심이 있었던 듯. 아무튼 이 소원은 결국 이루어졌다. 당대의 [[애처가]]로 유명하며 그 당시에는 드물게도 아내가 죽기 전에는 [[측실]]을 단 한 명도 들이지 않았고 아내 사후에도 끊임없이 아내를 그리워했다. 이 때문인지 모리 가는 아예 측실을 들이지 않은 [[모리 가 3형제]]를 포함하여 한 여성에게 충실한 경향이 있다. 다만 손자 데루모토는 여성 문제가 복잡했기 때문에 예외. 하지만 아내의 친정인 킷카와 가를 박살낸 건 다름 아닌 모토나리.[* 하지만 위에 서술했듯이, 먼저 배반한 것은 킷카와다.] 정실 사후에는 측실을 들였고, 측실과 유능한 아들들이 그를 계속 보좌했으며 금주를 생활화하는 것처럼 평생 건강에 신경을 많이 썼기에 측실들에게서 여섯 아들을 낳았는데 그 중 막내는 '''71세의 나이에 얻었다'''.[* 비슷하게 70대 중후반에 자식을 본 사례로 [[종요]]나 [[김일성]] 등이 있다.] 이때 얻은 아들이 모리 히데카네로, 형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로 들어갔다가 도요토미에 인질로 들어가 [[타치바나 무네시게]]와 [[의형제]]를 맺는다.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에는 서군 측에 섰으며, 직후 [[요절]]한다. 정실 자식들인 3형제는 애지중지했던 것과는 달리 측실 소생 자식들에 대해서는 애정이 좀 없었는지, 모토나리가 남긴 편지에 ''''버러지 같은 녀석들'''(虫けらなるような子どもたち)'이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완전히 홀대한 것만은 아니었는지 "만일 그놈들 중 좀 현명하게 크는 녀석이 있다면 타카모토, 모토하루, 타카카게 너희 셋은 불쌍히 여겨서 먼 국경에라도 보내주고, 좀 덜 떨어진 녀석은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 말아라"라는 편지를 남겼다고 한다. 이런 행동은 [[정실]] 태생 [[적자]]와 [[측실]] 태생 [[서자]] 간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려는 의도로 해석되고 있다.[* 일본사는 한국만큼 서자 차별이 심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없진 않았다.] 그래도 측실이 낳은 넷째 아들이 바로 '호이다 모토키요(穂井田元清, 1551 ~ 1597)'라는 사람인데 그 역시 제법 유능한 인물이여서 '네 번째 화살(四本目の矢)'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고, 모리가 영지 동쪽 지역에 주둔하면서 주로 이복 형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와 행동을 같이 했다. 실제로도 친해서 타카카게를 '카게 님(景さま)'이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남아 있고[* 형제 서열로 보면 타카카게 바로 아랫동생이 모토키요지만 둘은 18년이나 차이난다. 당시 시대상에 비춰보면 아버지와 아들 뻘이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다.], 죽기 전에도 타카카게와 나란히 와병중이었는데 "둘 중에 누가 먼저 죽을까"라는 대화도 나눴다고 한다. 결국 타카카게가 죽고 약 1개월 뒤에 모토키요도 사망한다. [[사세구]]에는 >'''友を得て なおぞうれしさ 桜花 昨日にか はる 今日のいろ香は''' >'''벗을 얻음에 나와 같이 기뻐해주는 벚꽃이여 오늘은 어제보다 색도 향도 더하는구나.''' 죽기 세 달 전에 꽃놀이에서 읊은 싯구라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